2월의 에피소드 : 기억나는 시간들
2020. 12. 3. 14:54느슨한글
2월의 첫날에는 거리두기를 하는 분위기에서 생토마토를 강행했다. 우리는 종로에 있는 어떤 카페에 갔고 코 시국에 비누가 없었던게, 그리고 주방에 물어봐도 그 카페엔 비누라는게 없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카페를 떠올릴때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화장실에 다녀와서도 비누를 쓰지 못하는 사실에 온몸이 얼어버린다.
그날 헤어지기 아쉬워서 셋이서 커피앤시가렛에 갔었다. 그 카페가 너무 궁금했기도. 그러고 보니 둘다 흡연자였네. 거기서 했던 여러 말을 했었는데, 누가 취향에 대해서 말했던게 떠오른다. 나는 취향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그 때 만나던 누군가의 취향이 별로다라는 말을 들었던거 같다. 취향은 어느정도 돈이 있어야 여러개를 경험해보면서 좋은 취향을 만들 수 있다고 했었던거 같고. 돈이 많은데도 좋은 취향을 갖지 못할 수도 있음을 말했었다. 그 이후로 가끔 좋은 취향에 대해 생각한다. 나한테 좋은 취향은 향수(perfume) 정도의 문제인데 그 때 그 친구에게 향수는 그것보다는 좀 더 무언가의 것이어서 그런 생각을 듣는게 신기했었다.
수영과 듀오링고를 열심히 했었다. 비건위크를 시작했고 이 때는 간단하게라도 아침에 밥을 차려먹는 습관이 있었다. 점심시간엔 옆 건물의 친구들을 만나 이것저것을 먹으러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닭갈비 집에서 먹은 구운김치가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모두가 구운김치에 감탄했고 나도 입을 모았는데 정작 그 닭갈비집에 다시 간 적은 없었다. 아마 내가 닭갈비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던게 아닐까.
영월 여행을 또 갔었는데 요즘도 그 때 사진을 보면 행복해진다. 도착하자마자 먹었던 회에 소주도, 알딸딸한 취기에 햇살을 받으며 읽었던 비행공포 책도. 매일 뭐 먹을지 고심하면서 차려먹었던 밥상도. 완벽한 밥상을 준비하고 싶어서 이노에게 뭐라고 했었던거 같은데 항상 지나고나서 후회한다. 12월이된 지금도 별것도 아닌 그 순간에 참지 못함을 후회한다. 얼마전에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며 한탄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설명하면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에는 좀 달라질 수 있으려나.
서촌에서 했던 생토는 올해의 전설이 되었다. 전설의 책 비행공포! 게스트가 2명이나 왔음에도 5명이라는 저조한 참여율이었지... 그런데 너무 재밌는 책이었던 주에 생토에 참가할 수 있어서 좋았다. 꼭 끝까지 읽어봐라는 말만 23번쯤 한 것 같지만 대장 헤르쯔가 다 읽어왔어서 그냥 재밌다는걸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어서 재밌었다. 그리고 어떤 베이커리에 가서 이것저것 사고 집가는길에 길가에 쌓여둔 책을 주어왔다. 3권을 가져왔는데 그 중 2권은 아직도 펼쳐보지도 않았고. 책장에서 책들을 볼때마다 서촌의 조용함과 그 베이커리, 놀러왔던 게스트 친구들, 비행공포를 했던 그 생토날이 떠오른다.
동네에 아무도 찾지 않는 달콤커피 카페에서 친구를 여러번 만났다. 퇴근 후에 만나서 책읽고 각자 이것저것 하기 였는데. 책도 읽고 그림도 끄적이고 회사욕도 하고 동네 친구와 할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을 했다. 그 사이에 그 친구는 우리 동네를 떠나서 이제는 지하철을 타고 30분은 가야 만나는 사이가 되었는데. 괜히 아쉽다. 아무것도 안해도 쉽게 불러낼 수 있는 친구였는데! 40대쯤 되면 우연히가 아니라 가까이 살고 싶은 마음으로 이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는데. 동네친구가 많으면 어떻게 행복해질지 꿈꾼다.
2월에 눈이 많이 온 날이 있었다. 싸래기 눈이 오는 어느 날에 성수동에 color 주제의 전시를 보러 갔었는데. 인스타 감성스러운 전시였어서 너무 실망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그 환상적인 모습이 기억에 남기도 한다. 당시엔 기대했던 주말을 망친 것 같아서 또 눈을 맞아가며 추운거에 지쳤어서 짜증을 냈었다. 그러다가 하이디라오를 처음 먹었는데 너무 만족했어서 몇 달 내내 하이디라오를 좋아했었다. 왜 자꾸 사소한거에 이렇게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된건지 생각해보게 된다.
엄마랑 넷플릭스에서 '두 교황' 이라는 영화를 봤다. 너무 재밌었던 기억. 엄마는 20대때부터 청년회에 있을만큼 오래된 천주교 신자다. 엄마에게 재밌는 영화를 찾아주다가 나도 같이 보게 되었다. 정말 운명이라는게 있나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그걸 보고있던 당시에 오히려 종교 미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거부감이 점점 옅어지면서 어쩌면 정말 사람의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몇 번 해봤다. 얼마전에 정국이 운명을 믿냐는 질문에 자기는 믿는다고 했었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걸 봤었다. 그걸 보면서 나도 운명을 믿는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해봤다. 어쩌면 운명을 믿고 있는데 '나는 운명을 믿는 사람이야'라고 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정해져 있어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달라지는게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운명은 미래에 도달하면 어떻게든 다음 결과가 펼쳐진다는 수준의 것인데. 나도 정리가 안되어서 이게 무슨말인지 어렴풋하게밖에 설명이 안 된다. 가끔 미래를 상상해도 어떻게도 그려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막상 그 상황에 도달하면 나는 어떻게든 그 순간을 살아 낼 거라는 믿음이라고 해야하나. 아직은 잘 모르겠는 어렴풋함이다.
경제 공부, 주식 공부, 수영, 듀오링고, 비건, 알로카시아 키우기의 일상에 충실했던 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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