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에피소드 : 지금은 아득한 1월

미피_ 2020. 12. 1. 21:34

느슨한글

 

블로그를 쓰면서 지나간 조각 기억을 되찾아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사진찍은것 살펴보기, 지출기록 보기, 개인/업무 캘린더 일정보기, 그리고 블로그 다시 읽어보기.

지나간 기억들은 확실히 기록된 그대로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데. 나는 또 당사자라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그 때 분위기라든가 상황들도 같이 떠오른다. 나는 사진 찍는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그 때를 기억나게 해주는건 사진의 엄청난 매력이라서, 최근에는 사진찍기를 너무 미워하진 말자고 생각한다.

 

작년에는 연말 모임 일정이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는데. 그 여파로 새해 첫날엔 몸이 안좋아 집에서 카드캡터 체리를 봤나보다. 나는 가끔가다가 카드캡터 체리를 정주행 하고싶을 때가 있는데. 카드캡터체리는 옷이 너무 귀엽고 청명이와 도준이가 멋있어서, 그리고 카드를 한 장씩 모으는 그 에피소드도 재밌어서, 무엇보다도 오프닝 ost가 너무 신나서 돌아오게된다.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가 운동화를 사게 되었는데. 그 신발을 오늘도 신고 있다. 평소에 거의 운동화밖에 안신는데 이 신발을 1년동안 신었네 벌써. 그리고 친구들과 곱창을 먹었지. 이제는 고기를 먹을때 조금 머뭇거리게 될 때가 생겼는데. 그래서 곱창같은 음식에서 조금 멀어진 것 같다.

 

연말에 샀던 풍선들을 방에 달아뒀는데 꽤 신났었지 그때. 익숙한 공간이 낯설어지는 그 기분이 신기한데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아 재밌었다. 작년엔 자주 갔었던 점심 식당이 있었는데 올해는 잘 안가게 된 곳이 있다. 메뉴를 줄이면서 괜히 그랬고, 음식 맛이 바뀌어서도 그랬고, 생각보다 채식 메뉴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머리가 어깨에 겨우 닿기 시작하는 단발이었는데. 요즘도 그 때의 머리를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든다. 가끔 좋아 보이는것에 일단 경계할 때가 있다. 단발 머리 시절의 나도 뭔가 경계심이 든다. 그 때가 좋아보였던 건 미용실에 몇시간 씩 앉아서 고통스러운 매직을 했다는걸 까먹어서 그런거겠지 하고.

 

몇 년 동안 꾸준히 이제 더이상 매직을 하지말자라고 다짐했다가 작년에 머리를 짧게 자르면서 매직을 했었다. 나에게 매직은 좋으면서 혐오하는것이다. 하고 나면 관리하기도 쉽고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데 어쩔수없이 몇 달뒤에 자라나는 머리를 보면서 그 때의 고통을 떠올리고 이 곱슬을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게된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나에게 곱슬머리야? 라고 묻는 말을 싫어한다. 그걸 묻는사람이 곱슬머리가 아니어서 나의 일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음만 남기고 떠나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거의 1년의 시간동안 매직을 하지 않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데. 지금은 또 겨울이라 어떻게 버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다가올 여름이 두려울 때가 있다.

 

두부가 추천해준 듀오링고를 시작했다. 지나간 일들이 정말 쉽게 잊혀진다고 느껴진다. 듀오링고로 중국어를 배웠을 때는 지금의 애플워치처럼 조금은 열정적으로 했었는데. 그게 1년도 되지 않은 일이라니. 그 때 나는 이곳 저곳에 듀오링고를 추천하고 다니고 블로그에 리뷰를 남길정도로 좋아했었는데. 이럴 때 무언가가 쉽게 잊혀질 수 있다는걸 생각하면 괜히 찔린다. 소중한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부여잡으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러고 보니 나는 중국어에 대한 미련을 이때에도 조금 품고 있었나보다. 지금은 중국어 책을 사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것도 뜨뜻 미지근하게 될까봐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쓸때가 대부분이다.

 

나니와 주식강의를 들으러 강남까지 갔었다. 그 때 주식 강의에 가서 느꼈던건 세상에 참 돈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그 강의실은 중년의 남자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틈에서 20대 여자는 매우 드물었다. 괜히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서운 사람같다고 느껴졌는데. 알 수 없는 용어들을 들으며 이해할 수 없는 강의를 들어야만 했어서, 금요일 밤에 친구나 가족과 놀아야 하는 시간에 빽빽히 앉아 답답한 강의실에서 주식 이야기를 들어야 했어서 그랬으려나. 1년동안 주식을 하면서 느꼈던건 평범하게 해서는 절대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기 힘들다는 거다. 주변 사람의 흘러가는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한거고. 그건 주식에서만 필요한게 아니라 살면서도 가장 의심되는 부분인데. 무언가에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러우면서도 무섭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걸지 조금 상상하게 되어서.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절대적인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럴때 나에게 절대적인걸 강요하는 스스로의 모순을 비웃게된다.

 

퇴근후에 러시아워를 뚫고 만나는 친구들은 정말 친한친구다. 깜깜한 겨울밤에 1시간동안 버스에 갇혀있으면 남아있는 인내심이 바닥나버리는데. 친구들을 만나서 맛있는걸 입에 넣으면 다 죽은 배터리를 긴급 충전해주는 기분이다. 잠깐 돌아갈 만큼의 전력만 충전되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길에는 빨간불이 깜빡이고 있었다는걸 다시 알게해준다고. 그렇게 지친몸으로 집에 돌아갈때 내가 얼마나 얘네들과 재밌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머리에서 생각나는 그대로 쏟아내고 왔어서 그다지 기억나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재밌을 수 있나 싶고. 그 힘든데 재밌는걸 잊지 못해서 매년 만나기로 하는데 올해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라도 재밌어질 수 있으니까 속상하진 않아.

 

겨울하면 주말 낮에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다가 다가오는 노곤함이 생각난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내가 읽었을지도 모르는 그 시집의 구절을 보면서. 세상에 나는 나쁜것도 많이 본 만큼 좋은것도 많이 보았었는데. 내가 지금 무엇을 기억하고있냐가 나를 결정하는것 같기도. 나는 꽤 자주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쩔 땐 더 욕심 많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고, 어쩔 땐 내가 정말 좋은것에 둘러싸여 있나라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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