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찜과 큰엄마
2020. 9. 12. 00:52느슨한글
나는 아구찜을 좋아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 큰엄마가 아구찜을 해주셨다. 어린 나는 그게 너무 맛있다고 계속 찾을 정도로 아구찜을 좋아했다고 한다. 큰엄마는 아구찜의 고향인(?) 마산분이셨다.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맛은 분명 장난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아무리 되짚어봐도 큰엄마 기억은 매우 흐릿하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또는 미취학 아동일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후 큰아빠가 두 번째 결혼을 하셨어서 내가 기억하는 큰 엄마 얼굴은 두 번째 큰엄마뿐이시다. 큰엄마가 두 분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한 것도 중학생? 고등학생? 때... 엄마랑 얘기하다가 “응?” 🤭?! 하면서다. 당연히 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억 너머의 다른 분이 계셨던 것. 엄마는 당연히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지금도 둔하지만 어린 나는 더욱 둔했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핏 다른 큰엄마 얼굴이 기억날 것도 같았는데 그저 내 상상의 결과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더 좋아했던 큰엄마는 첫번째 큰엄마라고 추측해본다. 내가 두번째 큰엄마에게 가졌던 호감이 어쩌면 아구찜~ 아구찜~ 노래를 부르던 내 어린 시절의 연장선 상이 아니었을까. 아구찜 먹을 때면 엄마가 “너 예전에 큰엄마가 해주는 아구찜 먹고싶다고 노래 불렀던 거 기억 나니?” 말하는 걸 보아서도 합리적 의심이 든다. 지금도 난 아구찜 세상 좋아 죽는데 이 맛을 처음 본 어릴 때는 오죽 좋아했을까.
[느낀 점1] 문득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대단하고 무서워졌다. 갑자기! 🧏♀️ 나는 미처 기억 못하는 사건이 알게 모르게 지금의 내 취향,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 엄마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나의 첫 아구찜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첫 걸음도 첫 한글도 기억 못하네?.. 뭐 모든 시작을 꼭 알아야하는 게 아니기도 하군요.. 어쨌든 흔히 말하는 어린 시절의 후폭풍(?)이...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느낀 점2] 내가 나로서 완벽히 기억되지 않더라도 무언가 남겨지는 것도 굉장히 큼직한 일이구나. 큰엄마는 내 기억에서 가장 흐릿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나에게 처음으로 아구찜을 맛보게 해주셨을테고 큰엄마 솜씨덕분에 내가 아구찜에 대한 좋은 첫인상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생김새나 말투, 그 무엇도 뚜렷하지 않지만 아구찜을 볼 때마다 이따금 떠오르는 존재.. 큰엄마는 나에게 크다. 아구찜을 좋아하는 만큼 큰엄마의 의미도 부풀어오르는 건가. 어쩌면 나는 나약한 기억세포 대신 아구찜을 향한 사랑에 의지해 큰엄마를 기억하고 있는 걸지 모른다.
여러번 반복된 큰엄마라는 단어. 허허..
'느슨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친구들아 (4) | 2020.09.14 |
---|---|
논스톱 브이로그 (5) | 2020.09.12 |
크레이프 쌓아서 케이크 만들기 (7) | 2020.09.10 |
darling, hold my hand (4) | 2020.09.08 |
엄마의 취향 (6) | 2020.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