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ling, hold my hand
2020. 9. 8. 23:57느슨한글
외출 준비를 할 때 음악을 틀어놓는 버릇이 있다. 좋은 노래를 찾아다니던 예전과는 다르게 아무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는 하는데, 오랜만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언제고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간다. 이를테면 어제 들었던 제스 글린의 목소리 같은 것.
2015년도 여름, 시험 기간에 후다닥 준비해서 떠난 두 번째 홍콩은 익숙한 듯 낯선 공간이었다. 전과 다른 점은 내가 아주 조금 만다린을 할 수 있었다는 거다. 몇 시인지 물어볼 수 있는 수준의 중국어는 핸드폰을 가지고 가지 않았던 호텔 수영장이나 홍콩섬으로 들어가는 페리를 기다리는 줄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할리우드 로드 부근이라 예약한 저렴한 부티크 호텔은 1박에 12-13만 원 했던 가격답게 방이 아주 좁았는데, 그 점이 오히려 홍콩다워서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층이라 열리지 않았던 좁은 창밖으로 내려다본 거리는 얼마나 아득했던지. 홍콩의 높은 건물들을 사랑했다. 하늘은 저렇게 높은데도 그냥 배경처럼 존재해서 손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높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데, 끝도 없이 건물이 늘어서 있을 때에야 오히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인식하게 됐다. 건물들 사이의 하늘은 너무 멀고, 너무 높아서. 오히려 좋았다. 쥐구멍에 들어오는 볕을 바라보는 시골 쥐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호텔 방에 있을 때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텔리를 틀어놓고는 했다. 그나마 익숙한 MTV 채널을 보며 나갈 준비를 하는데 뮤비 몇 개가 반복해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제스 글린의 Hold My Hand 역시 지겹도록 나왔던 노래였다. 여행 둘째 날부터는 “darling, hold my hand” 나 “I’m ready for this” 어쩌고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내내 함께했던 탓에, 이 노래나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으면 홍콩의 습함이 바로 떠오른다. 친구와 있었던 작은 호텔 방, 좁고 높은 건물들, 거리에서 나는 한약도 뭐도 아닌 냄새, 그 시절로 바로 갈 수 있다.
장범준의 벚꽃엔딩을 들으면 술 취한 채 교회 옆 골목에서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했던 기억이라든가, 취해서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던 풍경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무작정 기차를 타고 벚꽃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고등학교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는 진짜 학교 건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벤치에 앉아 야구 경기를 하는 고등학생들을 구경했었는데. 또 말하기는 민망한 어떤 곡을 들으면 지하에 있던 동아리 방이라든지, 소파에 누워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면서도 의식했던 앞에 있는 사람이든가. 올려다봤었나 아니면 나를 내려봤나 그런 게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곡을 들으면 자취방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거 너무 좋지 않냐고 얘기했던 게 떠오를 것 같기도 한 그런 것. 맞아 그랬었지. 그래서 다시 들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이 너무 좋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못 듣기도 하는 그런 것들.
음악을 들으면 멀리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어떤 걸 듣고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간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가보았던 곳 이외에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의 상상력은 빈약해서 온 힘을 다해야 듣는 것만으로 가끔 멀리 떠날 수가 있었다. 손을 잡아주는 무언가를 상상하며. 피아노 한 대로, 악기 하나로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책을 읽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