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생각

미피_ 2020. 9. 5. 12:46

느슨한글

요새 잠을 부족하게 자더니만 어제오늘 퇴근하고 집에서 내내 잠만 잤다. 덕분에 글토를 밀려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쓰고 있다.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한 채로 창문을 열고 햇빛을 받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니 프리랜서가 된 기분이다.

 

글토를 시작하고 나서 짧은 생각들을 모아두는 버릇이 생겼다. 어제는 출근을 하면서 느꼈던 가을바람에 대해서 메모했었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가을 냄새가 불어온다. 가을 냄새 하면 초등학교 운동회가 떠오른다. 가을 무렵에 했던 운동회는 나에겐 항상 즐거운 이벤트였다.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라 운동회의 줄다리기, 단체 줄넘기, 박 터트리기, 계주 달리기와 같은 시합을 하는 게 기대됐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모여서 언제 우리 차례가 되나 기다렸다. 구령대에 앉아서 서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노닥거렸다. 운동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낮에 샤워를 했다. 하루에 몰고 온 모래먼지를 씻어버리고 엄마가 해주는 간식을 먹었다. 종일 뛰어놀고 오니 낮잠을 자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당연하게 낮잠을 잘 수 있어서 좋았다. 어쩔 땐 젖은 머리 채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컴퓨터 게임을 했다. 컴퓨터 게임은 크레이지 아케이드, 메이플 이런 거였겠지. 그때의 그 기분들이 가을의 기분으로 기억 속에 남았다.

 

날이 선선해지면 정말 오랜만에 긴팔을 꺼내 입는다. 여름 내내 짧은 소매의 옷을 입다가 팔목까지 덮는 소매 옷을 입었을 때. 팔뚝에 천이 닿는 어색한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다. 가을은.

 

햇살이 내리쬔다. 작열하는 태양이 여름동안 체력을 자랑해 왔다면 가을의 태양은 좀 더 멋있게 변한다. 태양의 존재감을 항상 드러내지만 너무 덥지 않게. 파란 배경을 돋보일 수 있게 밝혀준다. 구름과 같이 오면서 그늘을 만들어준다. 저녁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하다가 춥다. 가을 태양은 없음으로 있음을 과시한다.

 

가을날에 버스를 타면 문을 열고 다닌다. 앉아서 맞는 그 시원한 바람이 좋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매일이 가을만 같으면 얼마나 새로울까. 어제 불었던 바람이 오늘도 시원하고. 어제 불었던 바람이 오늘도 상쾌하고. 그 바람이 내일도 변함없이 좋다면. 가을바람은 출근길의 걱정을 잊게 해 준다.

 

가을 점심은 너무나 짧다. 잠깐만 나가서 산책하면 금방 점심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어제는 도시락을 싸가 밥을 먹으며 읽던 책을 끝냈다. 이다혜 기자가 쓴 출근길의 주문. 요새 유튜브나 책에서 젊은 여성들을 위한 커리어 조언에 대한 내용이 종종 보인다. 이런 책이나 영상을 볼 때면 묘한 기분이 든다. 지금껏 내 커리어에서 멘토가 있었나?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엄격하게 조언해주는 그들은 사실은 우리들의 안녕을 빈다. 나도 오랫동안 충분한 수입을 유지하고 싶다. 사람의 일을 예측하기는 불가능한데 미래의 커리어를 상상하고 있자면 그 예측할 수 없음이 불안하게만 느껴진다. 그들이 말해주는 것들은 평범하지만 사실은 지키기 어렵다. 감정이 동요할 때면, 그래서 불안해질 때면, 다 포기하고 게을러질 때면 좀 더 현실적인 그녀들을 롤모델로 살아가기로 한다. 너무 이상적인 모습만을 꿈꿔서 불안할지도 모른다. 상상 가능한 미래들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려지지 않는 벽 앞에서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다. 그래서 그런 책들을 보면 회초리를 맞는가 싶으면서도 위로가 된다.

 

사주팔자 같은데서는 인생을 꼭 사계절에 비유하더라.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는 봄이 있고, 한참 일을 많이 하는 여름이 있고, 일하는대로 수확할 수 있는 가을이 있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있다. 나는 종종 지금이 인생의 어느 때인지 생각해본다. 요새의 마음은 겨울이 아닐까 생각된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불안해서 의식적으로 무언가 하려고 하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기도 마음을 내기도 어렵다. 우연히도 어제 봤던 책과 유투브에서 모두 쉼에 대해 말했다. 내가 항상 120%를 할 수 없음을 알고, 항상 최선을 할 수 없다는걸 알아야 한다고. 이다혜 기자는 그렇게 살면 죽는다고 표현을 하는데. 정말이다. 요즘은 내 마음이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때 같다.

 

그런데 또 알 수 없지. 지나고 보면 지금이 어땠는지 확실히 알테지.

그래서 요즘은 그냥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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