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 火傷
2020. 9. 1. 23:53느슨한글
1
태국의 햇빛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르게 아주 세서 한 번의 물놀이에 등이 다 익었다.
2
파타야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따웬 비치는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곳이 아닌 듯 했다. 그 넓은 모래사장에서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나와 친구 단둘이었을 거다. 우리는 호객 상에게서 썬 베드와 사물함을 빌렸다. 섬까지 들어가는 뱃삯이 30밧 정도였는데 썬 베드 하나에 100밧씩 줬다.
그때의 나는 햇빛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아주 하얬다. 당시 찍은 사진을 보면 탈색한 볏짚 같은 머리에 새하얀 북극곰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바다는 아주 예뻤고 썬 베드에 기대 평생 이래 본 사람처럼 굴었다. 한참을 누워있다 배가 고파서 가지고 있는 현금을 털어 노점상에서 음료수와 새우구이를 샀다. 새우라고 생각했던 건 새우 모양을 한 어묵 같은 것이었는데, 맛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대와는 달라 입맛이 썼다.
그곳의 바다는 맑다든가 푸르다는 말이 어울린다. 사람들의 말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건 주변 사람들과 나 사이에 어떤 막 같은 걸 만들어낸 것 같다.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며 놀았다. 주변 사람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바다와 수영장의 다름을 아는 사람이었나? 바다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조금만 들어가도 갑자기 바닥이 푹 꺼져서 발이 닿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올 때면 정말 떠내려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묘한 흥분감이 돌았다. 튜브를 타고 물 위에 떠 있으면 어느 정도 깊이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러다가 바로 섰을 때 발이 닿지 않기라도 하면 친구와 꺅꺅대며 헤엄을 쳤다. 흥분이나 공포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제트 스키를 빌리면 부표가 떠 있는 바다까지 나가볼 수 있다. 운전자 앞에 나란히 앉아 그가 운전해서 꽤 멀리까지 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튜브 색이나 머리통 같은 것으로만 친구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나가서 직접 운전해보라며 운전대를 손에 쥐여줬는데, 몇 번 급발진을 하다 보니 부표가 눈앞에 있었다.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쳤는데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눈이 기억 난다. 그리고 나는 이 바다에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나는 지금 말도 안 통하는 사내 앞에 앉아 깊이도 모를 바다에 떠 있다는 그런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그때는 헷갈리지 않았다.
섬을 오가는 배에는 직원을 제외하고 동양인이라고는 친구와 나 단둘이었다. 당시 파타야는 러시아 여행객의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때 블로그에는 "구경 당하는 기분이 신기했다"라고 써놨다. 배에 타고 있는 동안 나 역시도 그들을 열심히 구경했다.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온 것 같은 무리가 나와 친구를 훔쳐봐서 기억에 남는다. 머리는 금발인데 연장한 것 같은 속눈썹이 새까매서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몸에서 검은 건 자기 게 아닌 속눈썹 정도였을까.
3
긴 팔 카디건이나 선크림 같은 것이 무색하게 무참히 익어버린 등은 온종일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마사지를 받으면서도 등이 아프다는 생각을 못했다.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여독으로 몸이 힘든 거라고 착각한 듯 싶다. 햇빛 아래에 이렇게 오래 있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친구와 자리를 바꿔 내가 창가에 앉았다. 태국의 아주 늦은 밤에 출발해서 한국의 아침에 도착하는 비행기였다. 등이 아파 원피스를 살짝 내렸다. 시원한 기내에서 등을 내놓고 있어도 등이 타는 것 같았다. 기내식을 먹고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창밖으로 해가 뜨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 열어본 창을 통해 비치는 빛에도 등이 익을 것 같았다. 비몽사몽간에 창을 다시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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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는 저온 화상이라고 했다. 몇 주간이나 병원에 다녀야 했다. 등에 팩을 붙이는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았기에.
동남아의 햇빛에 화상을 입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신나게 놀 수 있었을까. 타기로 한 배를 친구와 미루고 몇 시간이고 바다에 떠 있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피부가 익는 것을 무서워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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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처음 해본 건 다 그랬다.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기 전에 홀라당 마음을 뺏기거나 뺏길 수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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