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었던 과제 하나.
2020. 8. 29. 23:01느슨한글
3년 전에 과제로 제출했던 건데, 오늘 글이 별 내용 없기도 했고 당시에 꽤 재밌게 쓴 것 같아서 올려요.
아마 이란은 봤을 지도. 당시 저는 '무임승차'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을 했었나봅니다.
현대시감상 - 「간판 없는 거리」, 윤동주
1,250원 어치의 몫
국어국문학과 20120016 김민지
정거장 플랫폼에 /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 다들 손님들뿐 / 손님 같은 사람들뿐
1연, 2연에서는 거리의 낯설고 쓸쓸한 모습을 시각화한다. 2연에서 ‘손님들, 손님 같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주인’이 없는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나타낸다.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 집 찾을 근심이 없어 // 빨갛게 / 파랗게 / 불붙는 문자도 없이
3연, 4연의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문자도 없이’에서 간판과 문자는 국가, 민족 등의 표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나라를 잃은 모습을 간판, 문자가 없다고 표현하였다. 또한 집 찾을 근심이 없다는 것은 나라를 찾을 의지마저 가질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퉁이마다 /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 불을 켜놓고
‘자애로운 와사등’은 화자의 감정이 투영된 사물이다. 낮에 보는 풍경과 밤에 보는 풍경이 다른 것처럼 밝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화자는 어둠속에서 와사등을 켰을 때만 보이는 것에 대하여 다음 6연에서 이야기한다.
손목을 잡으면 / 다들, 어진 사람들 / 다들, 어진 사람들
와사등에 불을 켜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어진 사람들이다. 그 어진 사람들의 손목을 잡는 행위에서 연대의식을 엿볼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순서로 돌아들고
마지막 연은 계절의 순환을 통하여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는 암울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간판 없는 거리」는 시인이 처한 시대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2017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이라는 땅에 한국어를 쓰는,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어떤 장소에 있어서는 낯선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그 물리적인(장소의) 낯섦이 심리적인 낯섦으로까지 전이가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홀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그곳에서는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이 손님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외부인이 된 존재는 근원적인 고독과 마주한다. 우리가 직면한 현재의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간에 손님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지 않을 수 없다. 주인이 아닌 불편한 누군가의 입장이다. 우리는 누구나 무적자(無籍者)이지만 이러한 무적자들의 연대의식은 그것을 버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연대는 손목을 잡는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연대는 맞잡은 손의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이 작품에서는 ‘손목’을 잡는 행위로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손목은 손과 마찬가지로 가장 잡기 쉽고 편하게 노출되어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손목 마디 하나만 움켜쥐면 되기 때문에 손보다 더 잡기 쉬운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손목을 잡는 것 보다 손을 잡는 것에 더 익숙하다. 연대는 손목을 잡는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렵지 않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손목을 쉽게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나’와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진 사람들’이 있으며, 연대는 언제나 필요하다. 손님과 같은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들에게는 손목을 잡을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것을 통하여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만을 가장 소수자이자 약자의 위치에 놓고 그 주변의 것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해서도, 우리를 가장 불쌍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자신을 가장 높은 혹은 낮은 위치로 정의하는 순간 그 외의 존재들에게는 포빅(phobic)한 관점을 취하게 된다. 끌어올리지 말고, 끌어내리지도 말자. 그저 옆에 있는 그 사람의 손목을 잡으면 된다.
「간판 없는 거리」의 마지막 연에서는 계절의 순환을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이 지속됨을 보여준다. 현재도 마찬가지로 손님들의 연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억압과 침묵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계절의 순환과 같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윤동주의 시와 윤동주의 시대는 암울한 현실에서 끝이 났지만 우리의 시대는 그렇지 않다. 억압과 침묵에 반(反)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은 세상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있다. 우리는 연대를 통하여 ‘간판’을 만들어야 한다. 간판을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지도자나 소수의 혁명가가 그것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작은 연대가 의미 없는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2016년의 촛불이 세상을 바꾸었고, 퀴어퍼레이드는 올해로 18회를 맞는다. ‘손님’같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손목을잡았다. 어진 사람들은 그렇게 작은 연대를 시작했고 그것이 곧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판이 완성되는 일은 결코 없다. 그것은 항상 만들어지는 중인 더 나은 세상과 같다. 우리는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250원 어치의 작은 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인분은 간판에 하나의 점을 찍었다. 점들이 모여 한 획이 되고, 획들이 모여 글자 하나가 될 것이다.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는 중이다. 언젠간 계절이 돌아드는 것은 ‘연대’의 순리가 돌아드는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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