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해명
2020. 7. 22. 15:44느슨한글
딸은 아빠랑 닮은 사람한테 끌린다던데, 이상하게도 아빠같은 부리부리한 외모의 남성에게 내 심장은 놀랍도록 차분하다. 반면 곱상한 남자들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내 취향은 꽤 유구한 편이다. 누군가 이상형을 물으면 난 병약 미소년이 좋다며 나불거린 역사가 깊다. 사실 실제로는 이상형의 남자를 만날 생각도, 만난 적도 없으며 애초에 만날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대체 왜 사람들은 이런 걸 꼬치꼬치 캐묻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끔은 무례하기도 한 그 질문에 소신껏 대답하면 보너스로 '아직 네가 어려서 뭘 모른다'는 조롱섞인 농담까지 들어야 하는 나였다. 내 취향이 뭐가 어때서 그들보다 덜 깨우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나이를 스물여덟이나 먹었고, 그때 내게 이상형을 묻던 웬만한 이들보다 나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기생오래비 타입에게만 눈길이 간다. 이 공감받지 못할 취향은 나이들수록 오히려 더 악독해져, 나이라는 옵션까지 추가되고야 말았다. 그래, 난 어린 남자가 좋다. 쇼타충이라해도 할 말 없다. 이마에 나 쇼타충이요 써붙이고 다닐 수는 없어도 어쨌든 자명한 사실이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사실 내 취향에 나이라는 기준이 추가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어린 여자가 최고라고, 산삼보다 고삼이라는 말을 우스갯소리 삼아 지껄이는 남자들이 짜증나서 나도 어린 남자 좋아한다고 우겨댔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말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예전엔 여자는 보통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니까, 나도 연상의 남자를 만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린 남자가 좋다고 생각하니까 어린 남자들이 진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애들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남자 중학생까지도 잘 생기기만 하면 남자로 보인다.(그렇다고 그들을 어떻게 해본 적은 없으니 신고하진 말아주세요)
물론 어리기만 하면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내가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이 가진 파릇파릇함에 있다. 어리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열정어린 눈빛, 그리고 그들의 불안함을 나는 사랑하는 것 같다. 남자가 나이들수록, 그리고 사회를 경험할수록 갖게 되는 ‘남성적인’ 태도가 싫다. 생각 많은 남자, 뇌가 섹시한 남자, 선생질하는 남자는 진짜 매력없다(패주고 싶다). 자의식 없는, 아직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쉽게 흔들리는 모습의 남자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면 제가 변태인건가요? 대답은 하지마세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가 남자 뒷바라지만 하는 조강지처의 이야기라며 안타까워하는 말들을 본적이 있다. 나는 평강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담론에 공감할 수 없다. 혹여 아버지가 점지해준 사위 후보가 세상 제일 총명한 남자였더라도 온달같은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를 내 입맛대로 굴리고싶은 평강의 그 선택은(조금 변태스러울진 몰라도) 너무나 이해 가능한 범주가 아닌가? 오히려 평강이기 때문에 온달을 선택할 수 있다. 평강공주는 아버지에게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애정 섞인 농담이든 아니든 그건 알 바가 아니고, 중요한 건 평강이 아버지의 협박 아닌 협박 그리고 강압적인 태도 아래 자라왔다는 거다. 한낱 가정의 아버지가 하는 말도 어린 아이는 두려워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왕이 하는 말은! 울보였던 평강이 매일 들어왔을 아버지의 폭언(?)을 상상해보라. 그러니 평강에게 내 말대로 움직이는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이었을 지 가슴 깊이 공감되는 것이다.
나는 순종적인 남자를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날 가르치려드는 남자는 질색이었다. 한창 뇌섹남이 열풍이던 그 시절에도 성시경을 필두로 한 그남들에겐 단 한번도 심장이 동요한 적이 없다. 이런 말도 안되는 가정법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만약 고대나온 남자와 빡대가리 남자 중에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난 망설임없이 후자를 고를 수 있다. 난 곱상한, 말 잘 듣는, 조신한 남자가 좋으며 여기에 나이는 그저 그 특성들을 강화해주는 하나의 요건이다. 물론 나이 또는 예쁘장한 외모와 순진함이 반비례-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그걸 증명해주는 사례는 우리 모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소위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외모의 남자는 왠지 자기주장이(혹은 ‘남성성’이) 강할 것 같은 편견이 있다. 음. 그래서 내가 부드러운 외모의 남성들에게 끌려왔던 것 같다고 허술한 결론을 내려본다. 사실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이성의 외모란 너무나 본능에 좌우되는 것이어서, 이외에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다른 이유들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재 남성과 연애를 할 생각이 딱히 없고, 나이 어린 남자 한번 따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는 변태도 아니다. 다만 혹시나 연애를 하게 되든, 티비에서 보게 되든 나이 든 남자보단 어린 남자가, 근육빵빵 허세남보단 병약남이 더 낫다고 생각할 뿐이고, 여자도 다양한 취향을(변태스럽든 아니든간에) 가질 수 있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가끔 남자 나이 스물여섯이면 꺾였다, 남자는 군대 다녀오면 상장폐지다 등의 농담을 던지면 정색하고 반박하는 반응이 서운하다. 사실 그런 말들도 자꾸 하다 보니 꽤나 진심이 되어버려 이젠 웃자고 하는 말도 아닌데, 난 또다시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특이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만다. 다 같이 어린 남자 좋아해보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저 여성의 취향도 남성의 그것처럼 여러 가지 타입으로 정의되었으면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고, 언제나 취좆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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