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낼 수 있다는 것

누아nua 2020. 7. 21. 14:28

느슨한글


집으로 오는 길에 내 앞에 있는 남성이 나를 지나친 후 벨트 춤을 추스르는 걸 봤다. 찜찜해서 뒤를 돌아보니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딱 알았다. 아 노상 방뇨하러 가는군. 나는 대로변에서 마트를 끼고 돌아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 단지가 연식이 되어서 나무들이 울창하다고는 하나 노상 방뇨를 하기 위해 찾을만한 장소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 사람이 장소에 연연하지도 않는 것 같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노상 방뇨하는 모습을 본 게 몇 번이나 되지?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공원에서 바지를 내리는 할배를 본 적이 있다. 그 장소도 대로변에다가, ㅇㅇ공원이라고 표지판이 붙어있는 공원 입구였다. 그 입구 옆에서 할배가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봐서 오히려 내가 놀란 기억이 있다. 확실하다. 남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지를 깐다. 자신의 성기를 내놓는데 거리낌이 없다.

‘원하지 않았는데’ 남성의 성기를 본 경험들에 대해 떠올린다. 요청하지 않았는데 성기를 보여준 남자들을 돌이켜본다. 골목에서 마주치거나, 지나가다가 차 안에 있는 걸 보거나 등등 다섯 번은 넘지 않았을까. 사실 기억에도 없지만, 분명히 지나쳤을 노상 방뇨하는 남자들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자신의 성기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자의식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리고 깨닫는다. 남성의 일상을 섹시하다고 읽어내는 일이 드물다는 것. 남자가 대상화되는 일이 많을까? ‘섹시한 여자 모음’이라고 묶인 것과 ‘섹시한 남자 모음’이라고 묶인 것은 어떻게 다른지. 영화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질식할 위험에 처한 게 야하다고 모으는 남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것이나, 알바생이 봉투에 싸드릴까요?라고 묻는 걸 녹음 하는 남자들을 목격하게 된 순간들 같은 걸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노상 방뇨하는 데서 ‘야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데(나만 그런가요), 반대로 여성의 노상 방뇨는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을 넘어서(상상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상상만으로 음란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생각. 남자 노상 방뇨라고 검색창에 칠 때랑 여자 노상 방뇨라고 검색할 때의 결과는 다르지 않을까. 굳이 해보고 싶지는 않지만…이 글도 문득 저런 검색어로 유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꺼져 미친 새끼야…

다분히 성적인 의도가 배제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붙는 순간 ‘야하고’, ‘음란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긴 이 나라는 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곳이다. 여성의 면면을 조각조각 내어 성적으로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드라마나 영화 등의 매체에서 에피소드로 소비하는 장면들을 떠올린다. 벌써 쉽게 그려낼 수 있다. 술 취한 남성 캐릭터가 담벼락 앞에 서 있는 뒷모습, 시원하다는 남성의 표정이 화면에 잡히고 물이 흐르는 사운드가 들리겠지. 남성들은 화장실에서 얼마나 친목을 다지는지.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왜 아는데. 매체에서 보이니까. 또, 남성의 몸은 얼마나 알아야 하는 것, 지식의 범주에 들어있나. 몽정이라든가 아침 발기라든가 마치 남성의 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당연한데, 여성의 생리 주기라든가 여성의 성욕에 대해서 아는 남자들은 얼마나 있을까.

여성이 바지를 내리고 앉아 노상 방뇨하는 모습. 앞선 문장을 보는 나조차도 뭔가 부끄러운 상황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야. 하지만 여성을 남성으로만 바꿔도 전혀 다른 문장이 된다는 게. 남성의 몸은요, 보게 된 사람이 부끄럽고 눈을 가려야 할 것 같은데요, 여성의 몸은요 보여주는 사람이 수치스러운 게 된답니다…

이런 상황을 탈피하고, 전복하려고 프리 더 니플 같은 운동들이 생겨난 거겠지. 나도 남자가 브라 안 하니까 브라 안 한다는 농담을 하며 잘 안 입고 다닌다. 그런데 그런 운동의 의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이게 가능한 일이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보여주는 내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 되는 건가. 감춰져 있어서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많이 보이게 되면 부끄러운 것이 아니게 되는 건가. 그런 선후 관계가 존재하는지 의문을 느껴버리는 것이에요.

여남을 전복시킨 영화를 반 친구들이랑 같이 볼 때, 나랑 같은 여성의 맨 가슴을 보는 그 상황이 수치스러운 게 이상한 건지. 여성이 가슴을 내놓는 건 전복적인 거고, 부끄러움과 수치심도 학습된 거라지만, 그 부끄러운 감정은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영역에만 있는 건지. 그런 생각들.

여성의 몸은 해체되어 물성화되고, 여성의 몸 구석구석은 음란한 것이 되고, 성적 대상화가 되어 버리는데, 여기서 내가 내 몸을 수치스럽지 않게 느끼면 끝나는 건가.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이랑 여성 개인이 인식하는 여성의 몸은 다른 맥락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실 내가 내 몸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것은 내 개인의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닌지, 그런 비약까지 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개인과 사회는 함께 역동하는데 내가 또 이렇게 비약을 해버렸다.

결국, 드러낸다는 것에도 권력 차가 명확한데 더 드러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 고민에 대한 각자의 결론이 다르다는 점에서 생각의 방향이나 행동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를 더 드러내는 운동이 의미 없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감춰지고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여성의 몸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보여주는 것이 어떤 시작이고, 드러냄의 효용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렇게 남에게 성기를 보여줄 수 있어 버리는 남성들, 그가 의도하지 않으면 성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남성들의 몸을 볼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버립니다.

이런저런 어떤 생각까지 하냐면 여자가 원할 때만 섹시함을 드러내는 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까지요.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성적 대상화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생각까지요. 이런 이야기는 또 다른 기회에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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