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고 닫은 흔적
2020. 7. 17. 00:14느슨한글
나의 첫 기억은 엄마 아빠와 산으로 놀러 가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르지만 무척 즐거웠던 느낌이 함께 남아있다. 그 뒤로 조각조각 어렸을 때의 기억들이 흩어져있는데 전부 행복했던 기억들이라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슬펐던 기억은 내가 지워버린 건가, 아니면 정말로 기억날 만큼 슬펐던 적이 없었던 건가.
슬펐던 기억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부터이다. 이전 기억들과는 다르게 정확한 시기와 장소도 기억이 난다. 별일 아니지만 아직까지 기억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별일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가끔은 이게 작은 트라우마로 작용돼 행동에 제약을 걸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게도 만든다. 이런 나의 기억 일대기를 되짚어보는 이유는 계속 고민해 오던 인간관계 문제 때문이다. 인간관계. 언제쯤 이 단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70살 정도 되면 좀 편해지려나. 그때도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이번엔 잘해보자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고 있다면 큰일인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하지? 우선 나는 겉과 속이 매우 다르다. 겉은 너스레 장난도 잘 치고 사교적 스타일인 거 같은데 속은 아주 깐깐하게 굴고 있다. 까탈스러운 속내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하루에도 여러 번 상대에 대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어느 날은 살짝 문을 열었더니 나랑 다른 생각을 불쑥 들이밀어 다시 문을 쾅! 닫아버리기도 하고, 다른 날은 시간이 지나면서 벌어진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궁금함에 또 문을 연다. 이런 저울질을 정말 몇 년 동안이나 해대는데.. 나도 나 자신에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다. 왜 이렇게 태연하지가 못할까. 아 물론, 나도 친한 친구들이 있다. 고맙게도 마스터키를 가졌거나 택배기사님처럼 반갑게 문을 열게 만드는 사람들 덕분에.
어릴 때 이야기로 돌아가서 더 설명하자면, 나는 이전부터 친구를 사귀는 것에 아주 큰 의미를 두었었다. 내가 외동이어서 그런 것도 있는데 항상 부모님이 안 계시면 나는 혼자다 라는 생각을 해서인 것 같다. 많은 지인들과 떠들썩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했고 함께 놀 친구로 선택받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리고 나랑 놀자고 여기저기 몸부림치는 동시에 누구에게 진짜 문을 열어줄지 재단했다. 친구들은 바보가 아니여서 내가 혼자 '문 열었다 닫았다' 놀이를 하는 동안 조용히 떠나거나, 문을 세게 걷어차고 가버렸다. 그러길래 왜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문을 쾅쾅 두드려. 나는 똑똑 노크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의 방어기제와 성격차이가 폭탄이 되어 터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의 충격이 꽤 컸는지 누군가와 트러블이 생기면 오한이 오듯 속이 달달 떨린다.
원래 기질이 조심성이 많은 것인지, 자라온 환경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런 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어왔다. (나의 즐거운 인간관계를 쏙 빼고 말하니 너무 과민하고 어려운 사람처럼 묘사가 된 것 같지만 아무튼.) 지금은 나이를 좀 먹었다고 나도 모르게 폭탄을 제조하고 앉아있진 않는다. 속이 달달 떨리는 상황이 종종 있긴 해도 그럭저럭 잘 넘어가는 중이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한 편이어서 사소한 일들은 대부분 까먹어버린다. 불편한 감정을 잠시 외면하는 것을 통해 시간을 때우면 어느새 괜찮아져 있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하도 열었다 닫았다 해서 너덜 해진 문을 붙잡고 있다. 그간의 경험치로 더욱 문 개폐 여부에 신중해져서는, 얼마 큼을 열고 닫을지 까지 결정하면서 말이다. 지금 부딪힌 고민들도 이러한 맥락의 것들이다. 뭐 항상 하던 거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고민을 해내고 있다.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평생을 이러면서 살 거 같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러겠지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하고는 있는데 나만은 그러지 않는 쿨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공존한다. 능숙하게 인간관계를 다루는 멋진 어른이 되고픈 로망이 있어서. 언젠가 잡고있던 문에서 손을 떼고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에 의연해지는 날이 오기를. 제발
* 고민 중인 인간관계와 토마토들은 상관없습니다. 혹시나 오해하지마,,
추가) 쓰다보니 진지해졌네요. 간혹 있는 일들에 대한 잡생각이라.. 일상의 저는 이렇게 심각하지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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