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에피소드 : 스쳐가는 걸 잠시 붙잡았다가 다시 보내주고
2020. 12. 11. 16:23느슨한글
방 정리를 하면서 오래된 교과서를 버렸다. 사실은 간직하려고 남겨두었던 책들이었다. 고등학교 문학책, 중학교 국사책, 그리고 초등학생 때 썼던 단소 교본들. 방을 정리할 때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러다 어떤 날 어떤 시에 파박 하고 영감을 받아 쌓아두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처분한다. 6월의 어느 날에도 그런 벼락같은 걸 맞았는데 평소랑은 조금 달랐다. 폐지로 내다 버리면서 지난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드디어 마음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다는것이 후련 섭섭했지. 이 기억을 또 간직하고 싶어서 남아 있는 것들을 내다 버리는 와중에 또 기억할만한 사진을 찍어두었다. 만질 수 없는 무언가로 컴퓨터에 저장되는 걸 예전에는 신경쓰지 않았는데. 아마 블로그를 하면서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생겨서 사진을 찍게 된 것 같다.
지금껏 내가 떠나보냈던 것들 중 두고두고 후회하는 건 조카에게 빼앗기든 주게 된 강아지 인형 뿐이겠지. 그리고 분홍색 곰돌이 인형 가방도. 그 이외의 많은 것들은 사실 내가 버렸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채로 이미 흘러간 거겠지. 어떤 물건을 내 손으로 떠나보낼 수 있다는 건 대체로 멋있다. 손때 묻은 교과서를 버리는 것은 더욱 그랬다. 과거의 기억을 한구석에 남겨두어 잡동사니로 여겨지는 것들이 쌓이는 것도 그래서 더 큰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가 싫었다. 사진 한 장으로 남은 그 책들이 이젠 또 글로 바뀌어 남겨진다. 내가 그 책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떠나간 책들이 잊혀져도 과거의 내가 그 책들을 잘 간직할 것 같은 마음에 빈자리가 허전하지 않다. 살면서 만나는 것들을 모두 간직할 수 없다는 걸 멋있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언제였지 찾아보았는데 바로 6월이었다. 글토마토를 시작한 게. 그리고 글토를 전후로 생토마토에서 수많은 파생방이 생긴 것도. 사실 꽤 오래전부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흘려보내는 생각들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글을 쓰고 나서 느낀 건 처음과는 조금 다른 마음이다. 글을 쓰는 것의 좋은 점은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를 보내며 많은 순간에 이것저것을 생각해서 꽤 좋은 글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생각을 글로 옮기면 놀라게 된다. 내가 이렇게나 간단한 걸 왜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나는 숲은 아니더라도 나무로 생각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글로 옮기면 하나의 잎사귀, 하나의 나뭇가지들로 글이 끝나버린다.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 건지, 표현력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기대치가 낮아진 건지. 요즘은 생각을 적어내면서 놀라는 순간은 줄어든 것 같다. 그리고 뭔지 모르겠는 것들이 명확해진다. 나는 꽤 일상에서 감정을 뒤돌아보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감정과 그 순간을 다시 돌아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을 말로 풀어내면서 이랬구나, 저랬구나 생각해본다. 그래도 모르는 것들을 어렴풋한 상태로 정지시켜둘 수 있다. 그러다가 책을 읽거나, 누가 했던 말을 듣게 되거나, 또는 다른 순간에 드는 생각들로 명확해질 때가 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밝혀냈겠지만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로 만들어 말할 수 있게 될 때 '아 조금 멋있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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