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2020. 7. 25. 23:59느슨한글
며칠 전,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아이랜드라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봤다. 아이랜드는 CJ E&M과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합작으로 200억인가 투자해서 야심차게 내놓고 망..해가는 프로젝트이다. 한 달 전쯤 부터 코엑스 앞을 지날 때면 크게 걸린 프로그램 광고로 곧 방송 예정임을 알았었다. 하지만 프로듀스101 시리즈 조작 논란으로 큰 분노를 산 CJ, 서바이벌이 가진 잔인함 등등 여러 이유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워낙 아이돌을 좋아하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주말드라마보다 말려들기 쉬워서 일부러 더 무시했다. 분명 그런 이유였는데 4회차 재방송이길래 스토리로 치면 중후반일 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틀어뒀다. 오, 무섭게도 그 한 회를 보고 내 픽이 생겼다. 정말이지.. 나도 프로그램도 대단한 걸? 유튜브를 검색해 영상을 좀 더 보았다. 온라인 투표를 시작해서 오늘 온라인 투표도 했다. 이런 내가 싫지만 이왕 생겨버린 내 픽은 데뷔해야하는 게 맞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청률이나 화제성에서 망한 탓에 주변에 같이 떠들어 줄 사람이 없다. 덕분에 나의 과몰입이 꽤 진정됐다.
프로그램 내에서 23명의 연습생은 1군(아이랜드)과 2군(그라운드)로 나뉜다. 테스트와 자체투표를 통해 계속 바뀐다. 아이랜드와 그라운드는 공간이 분리되어서 인프라 자체가 다르다. 대표적으로 아이랜드는 1인 1태블릿PC인데 그라운드는 13인 1태블릿PC다. 대부분 10대인 아이돌 연습생 세계인데 전면에 드러난 차별과 함께 계속해서 평가받고 경쟁하다니, 이처럼 잔인한 필드에서 견디려면 보통 정신력으론 안 되겠다.
아무튼 내 픽은 그라운드-아이랜드-그라운드를 넘나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라운드에 더 마음이 갔다. 아이랜드는 그 안에서 생겨버린 특유의 친목과 정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랜드 연습생들은 언제든 그라운드로 떨어질 수 있어서인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견제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게 상당히 고깝게 느껴졌다. (친구들에게는 저 놈들 ㅊ목 극혐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라운드도 자기들끼리 며칠 연습하다보니 아이랜드 올라가자 으샤으샤하는 유대감이 생겨있다. 왜 그 모습은 덜 불편할까 생각해봤더니 경쟁/서열관계가 적용돼 있어서다. 자리를 지켜야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더 마음이 좁아지는 거다. 그런 구조를 지켜보는 나도 이렇게 몰입이 되는데 그 안에서는 얼마나 휘둘리기 쉬울까. 구조에서 벗어나서 본래 큰 의도(데뷔?)에 초점을 두고 열중하는 사람이 승자아닐까.
맘에 드는 장면. -> 그라운드에서 올라온 연습생 제이가 테스트 받을 댄스유닛으로 결정돼서 연습하다가 안무를 잘 소화하지 못한다고 이미 친한 아이랜드끼리 쑥덕였다. (시청자 입장에선 거기서 거기인 실력..) 그리고 제이한테 급 통보했다. 당신이 부족해서 다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이 프로그램의 문제다. 아이랜드 내에서 자체투표를 하면 기존 아이랜드 사람이 이기고 그라운드에서 올라온 사람은 진다. 이때 제이가 자기 자존심 긁혀서 날선 모습을 보였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좋았다. 장면을 보고 있는 나의 기분도 그랬기 때문.. 노렸냐 제작진?
프로듀스 101 시즌2가 나와 내 주변을 조져버렸 때, 이 서바이벌을 왜 좋아하는 건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우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속에서 참가자의 순수한 열정,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 등을 본다. 응원하고 때로는 욕도 서슴치 않는다. 잔인한 경쟁 구도에 용감하게 지원해서 꿈을 갖고 고군분투하는 참가자를 대견해하다가 순간 그런 모습을 내가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갖지 못할 열정이나 승부욕, 능력 등에 대리만족하면서 시청하고 있는 건 아닐까?’와 같은 생각들을 친구와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데뷔 후보다 데뷔 전, 데뷔 초의 아이돌을 더 응원하게 되는 것도 아이랜드보다 그라운드를 응원하게 되는 것도 관련이 있을까 .. 대리만족이 싫기도 하고좋기도 하다..
고모집 놀러왔다가 잠들어서 11시 넘어 깨어버렸어요
흑흑.. 급히 씁니다. 59분이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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