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2022. 12. 1. 17:12느슨한글
이 시간이 되면 배고프다... 대충 12시에 점심 도시락을 까먹고 난 뒤 중간에 간단한 간식ㅡ쿠키 한두 개 같은 것ㅡ을 먹어주지 않으면 굶주리며 퇴근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올해까지는 어떻게 대충 밖에서 사 먹거나 반찬을 아예 안 받거나 하며 먹었는데 채식인이 식당 밥 먹는 거.. 조금 힘들 거 알지...? 집에서도 늘 밥을 해 먹는 편이라 도시락 싸기에 도전했는데 9월부터 지금까지 2개월을 꽉 채워서 거의 매일 도시락을 쌌다. 대단하다 나...
처음에는 감성 도시락에 치중하여 일본식 나무 도시락에 예쁘게 플레이팅 하는 재미로 도시락을 꾸렸는데, 12월이 되자 그것도 녹록지 않아졌다. 나무 도시락은 보온 기능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나는 대충 점심에 식은 밥을 먹었는데, 한창 더웠을 때에는 그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날씨가 추워지니까 입안에 들어가는 음식이 차가운 게 묘하게 기분이 별로고 밥을 먹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때우는 느낌이 든 것이다. 내가 아침 시간에 말이야~ 출근 시간 쪼개가며 열심히 시간 들여가며(최대 15분) 싸왔는데~ 아우 열받어~ 하는 생각이 모락모락. 그니까, 따뜻한 밥을 먹는 게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걸 내가 알아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집에 있을 게 분명한 보온 도시락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말했던가? 고등학생 때 엄마가 도시락 싸줬다고. 학교 식당이 거리가 좀 있으니까 식당을 오가는 시간을 아껴서 도시락을 까먹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밥시간 쪼개서 공부해 보겠다고 도시락을 챙겨 다녔다. 그냥 교실에서 도시락 까먹으며 수다 떠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까 너무 대단한 거야. 우리 엄마도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아침에 내 도시락을 싸주지... 그리고 못 싸는 날에는 엄마 시간을 쪼개서 학교에 도시락을 갖다 주는 날도 있었다. 엄마 전화를 받고 운동장에 내려가서('내려가서'라는 표현을 쓰면서 깨달은 건데 우리 학교는 엄청나게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내려간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무거운 도시락통을 건네받았던 기억. 그 도시락을 동생에게 받아서 집에 가져왔는데 기억보다 크고, 어떻게 출퇴근하며 들고 다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락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는데 친구가 뭉클하냐고 물어봤지만, 그건 아니고 좀... 부채감이 느껴졌다.
모든 가정이 그렇듯! 나도 어느 시절은 혼자 크고 어느 때는 부모가 날 치열하게 키웠는데 그게 가끔 무거울 때가 있다. 영화 레이디 버드에 주인공이 엄마랑 싸우고 노트를 찢으면서 그럼 여기에 다 적으라고 키우는데 얼마 들었는지 내가 다 갚아줄테니까 이런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가끔은 나도 주인공처럼 이 부채감과 고마움과 사랑의 부담감을 다 갚고 깔끔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근데 이 장면 친구한테 얘기하자마자 주인공 철없다ㅠ 하는 반응을 들었삼 너무 웃기다). 그니까! 그건 그 당사자에게 다 갚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나도 살아가면서 책임이 있는 존재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한다. 대체 자식을 어떻게 낳아서 키우는 거냐. 이런 보람도 보답도 없는 행위를... 어떻게 내 영향을 무한히 받는 한 생명체를 낳아서 걔의 자립까지 책임지고 키우냐...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서움...
얼마 전에 친구가 조카랑 눈이 마주쳤는데 이 아이가 자기한테 다른 세상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야. 이런게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인 건가 싶었다고. 나는 좀 아득해져서 잘 상상이 안 갔는데 살다가 보면 또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 인생은 (당장 죽을 거 아니면) 길고 사람은 변하니까~ 또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구나 내 자신아 잘 돌아보며 살아보자꾸나... 그래서 이제는 나는 보온 도시락통에 도시락을 싸서 따듯한 밥을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삶의 질이 상승했고 감성 사진은 이제 없지만 아구아구 점심을 먹는 시간이 전보다 조금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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