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 라면
2022. 11. 2. 23:38느슨한글
엄마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죽기 전에 딱 한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남편이 끓여주는 라면을 먹을 것이다.
1. 엄마의 요리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한다. 뚝딱 뚝딱
순식간에 휘리릭 맛있는 요리를 해낸다.
엄마가 해주는 것은 다 맛있다.
친할머니는 자신이 배운 레시피를 반드시 지키고, 그 레시피를 고수해야하는 사람이었지만
엄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당신이 시집살이를 하며 전수받은 '서울식 궁중 요리'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엄마도 곧 그 맛을 내게 되었지만 엄마는 하고 싶은 요리를 했다.
할머니의 음식은 할머니의 음식대로 맛이 있고
엄마는 엄마의 음식대로 맛이 있다.
눈을 감고서 할머니의 음식을 맞출 수 있지만
엄마의 음식은 맞출 수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레시피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한결 같은 맛을 냈다.
분명한 것은, 할머니의 레시피는 나와 형제들에게 향수를 느끼게 하고, 나와 형제들을 연결해주는 다리이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도 요리에 대한 도전을 하고 있다. 오늘은 이걸 넣어볼까, 저걸 넣어볼까?
그래서 엄마의 요리는 늘 새롭고 늘 맛있다.
얼마 전, TV에서 연예인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나와서 어머니의 음식을 맞추는 프로그램을 했다.
나는 거기 나간다면, 엄마 음식을 맞출 수 없을 것이다.
엄마 음식과 멀어진지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엄마는 고정 레시피가 없기 때문이다. 아, 엄마도 변형시키지 않은 할머니의 대표 음식이 있다.
진미채볶음, 육개장, 유부볶음밥, 비빔국수
적어도 이 네가지는 우리 집안 요리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특히 육개장은,
이화수육개장의 육개장이 깊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올해 안으로 이 레시피를 반드시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2. 남편의 라면
20살 이후로는 부산 집에 내려갔을 때 말고는 거의 남편이 끓여주는 라면만 먹었다.
내가 끓이는 라면은 늘 실패다.
남편이 끓여주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
내가 끓이면 그 맛이 안 난다.
오빠가 처음 라면을 끓여주었을때, 물이 너무 적어서 솔직히 많이 짰다.
몇 번은 너무 짜서 물에 섞어 먹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빠는 덜 짜게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계란을 넣지 않았다. 오빠는 계란이 국물을 탁하게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계란 하나 넣고, 노른자를 터트리지 않는다.
내가 면발을 건져서 노른자에 섞어 먹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말 아침 오빠가 끓이고 함께 나눠먹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
내가 물을 올리고, 오빠가 라면을 끓인다.
나는 김치를 꺼낸다.
라면이 다 되면, 오빠는 내 그릇에 면을 덜어주고
노른자를 소중하게 꺼내서 그 위 올려준다.
자기 그릇에는 면이고 국물이고 일단 콸콸 덜어낸다.
그리고 맛있다, 맛있다 말하며 먹는다.
내가 주말 중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다. 음...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참 많이 맞춰주고 있었구나! 내가 10년간 늘 행운이라 생각했던 것은
오빠와 나는 식성도 비슷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서로 척하면 척, 착하면 착, 얼추 다 맞다.
이미 닮았던 게 아니라 서로 닮아 가고 있는게 틀림없다.
내가 봉사활동 하는게 좋다고하니, 오빠도 봉사활동 하는게 좋은가보다하고 시작했고
오빠가 치킨 중에는 BBQ가 제일 맛있다고하니, 나도 BBQ가 제일인가보다 하고 먹었다.
새삼스럽고 흥미롭다. 아마 이런 것이 한 두개가 아닐 것 같다. 그래도 가끔은 '남편이 이런 모습이 있었나?' 놀랄 때가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암튼 죽기 전에 한 가지 음식을 택해야 한다면, 할머니와 엄마의 육개장이 아니라 남편의 라면을 선택할 것이다.
사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대대손손 당연하게 먹어왔던 음식과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사람이 맞춰간 음식
이 차이인걸까?
아님.... 엄마의 고정 레시피가 없어서일까...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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