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나물

열세줄땅다람쥐 2022. 10. 18. 23:18

느슨한글

요즘, 무언가를 조금씩 좋아하게 될 때, ‘스며든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O며든다’라고 어디에든 붙여쓸만큼.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어떤 것을 조금씩 좋아하게 되어버리는 것도 있지만, 마치 교통사고처럼 뒷통수를 맞은 것 마냥 갑자기 무언가를 좋아하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 그 순간’을 기억하기도 한다.

조금 뜬금없고 특이하지만 나는 ’나물’을 좋아하게 된 그 순간을 기억한다.

어릴 때는 명절마다 상에 올라오는 삼색 나물의 맛을 이해하지 못했다. 콩나물 무침, 도라지 나물, 고사리 나물. 어른들은 대체 이걸 왜 먹는거야? 일종의 의식인가? 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 쯤이었다.
’한식‘에 대한 수업이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나에게 오늘 아침에 뭘 먹었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나는 그날 아침 씨리얼을 먹었는데 왠지 한식을 말해야할 것 같아서 그 전날 먹은 된장찌개와 고사리 나물을 말했다. 그 순간 요리왕 비룡의 눈이 번쩍이듯 ‘고사리 나물 맛있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아무 생각 없이 반찬이 고사리 나물 뿐이라 고사리 나물을 오물오물 먹었는데 다음 날에야 고사리 나물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나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좋아하게 된 건지, 좋아하고 있었는데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건지, 이미 스며들고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갑자기,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좋아한다는 게 가능할까?

음… 그런데 흘러가던 노래가 갑자기 좋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늘 듣던 빗소리가 갑자기 좋아지는 순간이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가능한 것 같다.

아주 어릴 때, 엄마랑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날, 엄마는 말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참 좋아 토독토독 타닥타닥
어린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스무살이 지나고 갑자기 그 빗소리가 나도 들리기 시작했고 그 빗소리가 좋아졌다. 왜 엄마가 좋아했는지 알겠다 싶었다. 정확한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참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 수록, 갑자기 좋아하게 되는 순간들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별 수 없지. 순간 순간을 만끽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화내고 불평하는 것에 시간을 쓰기는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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