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sigo, 님은 최악이에요
2021. 8. 18. 17:41느슨한글
요즘 가장 핫한 전시회, 요시고 사진전에 다녀왔다. 미피가 이야기 꺼냈을 때는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트위터에서 본 아트웍 포스터가 너무 청량했다! 그걸 사기 위해 다녀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시간이 어마무시하다는 후기가 많았지만 대기번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점심도 먹고 카페도 다녀올 수 있어 좋았다. 오픈 전부터 길게 줄 서있는 마제소바집을 지나쳐, 평범한 소바집에 가서 돈까스와 메밀소바 정식, 그리고 고구마 소주와 하이볼을 주문했다. 고구마 소주는 어디에서 고구마의 맛을 느껴야할 지 도통 감이 안 오는 그냥 쓴 술이었다. 밥을 다 먹고 카페에 가 빙수를 시켰다. 밥을 태라와 미피가 사 줘서 고마운 마음으로 카페는 내가 사려 했는데 팥빙수를 요청해서 퍽 애매해졌다. 빙수에 에그타르트 두 개를 추가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독특한 구조와 레트로한 인테리어의 카페였다. 중구난방의 가구들로 인테리어에 통일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걸 해냈다. 수다를 떨다 대기시간이 다 되어갈 때 즈음 밖으로 나왔다. 8월 중순인데, 내가 밖에 안 나온 사이 벌써 날이 많이 선선해진 듯 하다. 한낮에 돌아다녀도 햇빛이 따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전시회장엔 사람이 정말 많았다. 2층부터 4층까지 꽤나 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어떤 것도 차분하고 조용하게 감상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기 전시회의 숙명이겠지. 사람 많은 공간은 딱 질색이라 그 점이 가장 괴로웠다. 게다가 사진 촬영까지 허용되어 있어 발을 뗄 때마다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열심히 찍는 사람들을 맞닥뜨리는 것이 힘들었다.
요시고(yosigo)라고 하니 일본 사람같지만, 스페인의 산세스바티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따뜻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 특유의 낙천적인 분위기가 사진 곳곳에서 느껴졌다. 한국에서도 북부 지역에서만 살아온 나는 가질 수 없는 그 분위기가.
2층에는 그가 찍은 다양한 패턴의 건물 사진이 주로 걸려 있었고 3층에는 그가 여행한 도시, 그리고 그가 사는 도시의 강을 찍은 프로젝트가, 4층에 sns에서 많이 봤던 해변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염병의 여파로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해소하기에 딱 좋은 전시라고 생각했다. 마침 타이밍도 딱 무더운 여름이라. 코로나 이전을 느끼기 좋은 시원한 사진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유명한 해변 사진들보다 2층에 걸려있던 건물 사진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패턴과 대칭과 그림자, 보통 사람들은 쉽게 지나쳐가는 그런 것들을 섬세하게 담는 것이 사진작가의 역할인 것 같다.
3층은 요시고가 여행한 도시별로 구역을 나눠 놓았는데 도쿄와 두바이가 기억에 남는다. 도쿄는 스텐실에 빛을 비추어 낸 것인지, 정확한 기법은 잘 모르겠지만 사진 속 건물의 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연출이 참 좋았다. 보통 서양인의 시선으로 찍어낸 도쿄와 분위기가 사뭇 달라서 신기했다. 낮에 찍은 사진이 많지 않은 건 아쉬웠다. 두바이는 전시장에 직접 모래사장을 설치해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동물의 숲에서 그런 모래사장 바닥을 깔고 지내던 주민이 있었는데! 오래 전 내 섬을 떠난 아마민이 떠오르면서 그 집에 내가 들어와있다고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3층 끝에 있던 리우 아발 프로젝트는.. 음.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으로 포문을 연다. 사실 이 전시를 보면서 계속 어딘가 불편했는데, 바로 그의 이야기가 하나도 와닿지 않는다는 거였다. 전시장 곳곳에 쓰인 글 속에서 이 사람이 뭘 말하고 싶어 하는건지 나는 잘 느낄 수가 없었다. 리우 아발 프로젝트가 내가 느낀 모호함의 정점이었다. 강의 상류로 올라가는 것과 하류로 내려가는 것의 의미라든지, 그 강의 하류를 촬영한 것이 왜 '그를 둘러싼 영토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대답'인지(이 문장 자체가 너무 길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애초에 료브레가트 강에 대한 배경 조차 섬유산업 단지였다는 것 이외엔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았으며, 도대체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인용한 것인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변화와 강이라는 키워드를 잡은 것은 알겠지만 그의 작품 어디서도 변화와 강에 대한 이미지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작품에 관광객들을 무자비하게 담아낸 그가 본인은 동물적 관광객과 풍경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느니, 최대한 사람의 존재감이 없도록 찍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 황당했다. 내가 봤을 때 그의 작품, 더 나아가 그의 전시회까지 오직 관광객의 무게로 완성된 것 같은데 말이다.
잔뜩 불만을 늘어놓긴 했지만 전시 자체는 즐거웠다.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사진들도 무척 마음에 들었고. 다만 그가 조금 더 솔직하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을 뿐이다. 겉멋에 쩔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했는데 찾아보니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네.. 쩝. 어쨌든 사진은 맘에 드니 거금을 주고 포스터도 구매해왔다.(미피가 엽서도 사줬다><) 벽에 붙이니 분위기 있다. 이 사람 허세는 쩔지만 감각은 있네.. 미피 말마따나 이래저래 시기를 잘 타고난 작가같다. 굿즈 엄청 많이 팔았겠지? 모쪼록. 화이팅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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