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금

미피_ 2020. 10. 31. 22:02

느슨한글

 

월요일 저녁에 느닷없이 대학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결혼한다는 소식은 건너 들었었는데 몇 년 만에 연락이 왔지.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찬찬히 돌이켜보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더 자주 해보게 되었는데, 이번엔 알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있어서 이 감정을 생각해보려고 했다. 졸업한 이후로 한참 동안 연락을 안 했었던건 나에겐 큰 문제가 아닌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친한 친구들과 대학 시절을 되짚어보면서 밤마다 연구실 옆자리에서 같이 공부했던 것, 버스를 타고 집에 갔던 것, 사소한 이것저것을 떠올리기도 해봤다. 나는 우리를 얼만큼의 사이로 생각해야할까.

 

 

나에게는 평소에 쉽게 정의해버리고 그만큼까지만 믿어버리는 고치고 싶은 습관이 있는데. 어쩐지 이번엔 생각할수록 여러 갈래의 감정을 느꼈다. 언제는 수영이 끝나고 샤워하면서 문득 그 선배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 때 나는 밥을 사준다는 것도 거절해버리고 축의금은 5만 원만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 괜히 밥 약속을 거절했나 싶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지. 저녁에 이노이노를 만나서 샤워하면서 생각했던걸 우다다 말했는데. 늙어서 남는 건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이전에 추억들을 생각하다 보니 적당한 액수만큼 주고받는 관계로 정해버리는게 아쉬워서라고 내가 왜 축의금을 더 낼건지 오랫동안 설명했다. 그래서 축의금을 좀 더 내려고 마음을 결론지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생토마토에서 유부다람쥐에 결혼식에 다녀왔다. 결혼식에서 잠깐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는데. 결혼이 뭘까? 라는걸 생각해보기도 했다. 내 주위에 결혼에 대한 감상을 펼쳐놓은 사람은 지금까지 회사 사람들밖에 없었는데, 모두 한결같이 비슷한 반응이긴 했다. 이전에 어떤 친구가 했던 말인데. 경험하기 전까진 알 수 없다는 게 무섭다고 했다. 그 때 그 말의 의미가 뭔지 물었는데 납작하게 들어주었던 예시가 결혼이었고. 그게 떠오르기도 했다. 결혼해보기 전까진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처럼. (이 글감에서 그 얘기를 꺼내면 그 친구는 또 식겁하겠지만...) 결혼식에서 느꼈던 그 오묘한 기분은 뭘까. 마침 오늘 스토너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했는데. 각자마다 스토너를 바라보는게 인생의 가치관을 말해줄 것 같아서 생토마토 사람들의 가치관 얘기를 더 듣고 싶었었는데.

 

 

5만 원과 10만 원의 차이가 뭘까? 월요일에 카톡을 받고 나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을 끝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연락한 게 서운해서 그랬고, 카톡 한 마디에 괜찮은 것 같기도 했고, 다음날엔 이전의 추억들을 돌이켜보다가 그게 미안해서, 또 유부다람쥐의 결혼식을 가서 느꼈던 감정들, 거기서 생토 사람들이 괜찮아 5만 원 해도 괜찮아 소리를 많이 해줘서, 책을 읽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볼지 생각해봐서 자꾸만 축의금의 액수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언제는 밥상을 차리면서 어른들은 어떻게 했었나 생각해봤는데 뭐 자기의 인생은 결국 각자가 결정하는거니까. 내가 어렸을 적 우리집에 오셨던 친척 어른 중에 꼭 용돈을 주시는 분이 계셨고, 빵이나 과자나 과일 같은 것들을 가지고 오는 분이 있었다. 그땐 각자의 몫은 각자가 정하는거니까라고 생각했었지. 어디에서였는지 몰라도 며칠 전에 봤었던건데, '사람은 갈림길에 서면 자기의 마음속에 정해둔 길을 깨닫게 된다' 였었나? 밥상을 차리던 당시엔 그 말이 참으로 맞다고 생각했는데 또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시작되기도 하네.

 

 

글토마토에 올리는 걸 방에 쌓아둔 옷더미처럼 언젠간 해치워야지 하고 묻어두고 있었는데. 마침 멈출 수 없었던 글감이 나를 골라주어서 고마웠다. 그리고 이 글감으로 써봐야지 떠올렸을 땐 섹스앤더시티의 캐리 브래드쇼가 되어서 한편의 에피소드를 만든 작가의 기분을 멋지게 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이번 에피소드가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아서 아마 후속작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글감이 또 나를 선택해주기만을 기다려야지. 아 그렇다고 이게 또 자주 쓰지 못한다는 핑계는 아닌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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