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5
2020. 10. 5. 03:07느슨한글
모든 걸 다 집어던지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감정은 저 밑에서부터 아주 빠른 속도로 치솟는다. 울컥하고 치솟아서 나를 지배해 버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어던진다고 해도 끝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여기서 이걸 집어 던지면 던진 걸 다시 주워담는 일을 해야한다는 걸, 되려 일만 늘어난다는 걸 떠올리면서 하던 일을 이어나간다.
돌이켜보면 고등학생 때까지 그렇게 우울했던 건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희망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를 가장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말은 “지금이 가장 좋을 때다”, “사회생활 하다보면 학창시절에 힘든 건 아무 것도 아니다”와 같은 말이었다. 지금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의 인생에서는 이것보다 힘든 일들만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에 가면~ 하고 이어지는 좋은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았다. 어른들은 마치 대학에 가면 세상이 샤랄라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말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있어. 모든 게 한 번에 아름다워지는 그런 건 없어. 참으로 비관적인 고등학생이었다. 대학은 하나의 관문에 불과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취직을 해야하고, 취직을 한 뒤에는 승진을 해야하고... 그런 식으로 삶에는 끊임없이 과제가 주어지겠지. 산 넘어 산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처음으로 희망을 안겨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자신은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괴로웠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그때가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하지만 본인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더 힘든 일들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셨다. (그러고보면 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셨구나. 어렸을 때는 완강하게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선생님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결혼을 한다는 건 정말 좋은 친구가 생기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내신시험 때 나는 정말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시험따위는 집어 던지고 OMR 카드 같은 건 찢어버리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머리 속에서는 이미 그 요란스러운 상황들이 다 진행되었지만, 나는 얌전히 책상에 앉아있었다. 여기서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다고 느껴도 나는 내가 터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서 다 집어던지지 못하고 시험문제를 열심히 푸는 내가 좀 불쌍했다.
대학에 왔고 대학은 생각보다 즐거운 곳이었다. 대학생이 되면 여드름이 다 들어가고 피부가 좋아질 거란 말을 믿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믿었는데 맞는 말도 있었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캠퍼스 로맨스 같은 건 나에겐 없었지만, 아무도 말해준 적 없는 것들을 즐겼다. 대학에 와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패러다임이 달라졌다. 나는 줄곧 공부는 외로움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작년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친구들과 함께 공부 하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에너지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내가 담배를 피우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난 담배를 피우게 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입시가 끝난 뒤 크게 달라지는 게 없더라도, 입시가 끝났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큰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더 이상 수능을 치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수시 면접을 보러 온 고등학생들을 보고 집에서 울거나 수능 시험장으로 가는 버스 안내판을 보고 울던 시절이 이제는 지나간 것처럼, 수능을 다시 볼 일이 없다는 게 나에게 위안이 되는 이 시기도 지나가겠지.
여전히 모든 것들이 막막하고 답답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우리 세대에게 전 세대와 같은 경제적 도약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 역시 알지만, 그래도 나 개인의 행복은 다른 측면에서 새롭게 꾸며나갈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세상은 너무 좆같고 끔찍하고 얽히고 설켜있어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와중에도 무언가가 조금씩은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힘들면 그냥 다 집어던져버려도 된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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