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부터 수명까지
2020. 11. 7. 07:02느슨한글
글을 쓰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사실 글토마토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꾸준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는데.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는 내가 글을 써야하는 요일에도 글을 잘 쓰지 못하고 있다. 내가 유일하게 글을 써내려가는 순간은 글토에 쓸 때 뿐이다.
내가 하는 공부와도 관련이 있을까? 철학을 공부할 때에는 아무래도 텍스트를 많이 읽고, 사유할만한 주제를 다루다보니 이것저것 쓸 일이 더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의 나는 사유를 하기보다는 이해를 하기에 바쁘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적성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내가 철학이 적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학점을 항상 잘 받아오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들이 쉽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고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언제나 끙끙댔으니까. 하지만 사회과학을 공부하다보니 그 정도면 적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문대의 글쓰기와 사회대의 글쓰기가 뭐 그리 다르겠냐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년에 정외과의 수업을 듣고 꽤나 충격 받았다. 시험 문제에서 요구하는 것이 도저히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평소에 철학과에서 갈기던 것처럼 갈겼는데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다. 피드백을 받으러 갔더니 교수님이 왜이렇게 멀리 갔냐고 하셨다. 그래서 답이 뭐예요? 물었다. 진짜 궁금했다. 도대체 뭘 써야하는지.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답은 좀 허탈했다. 이 이론을 통해서 이 사례를 분석할 수 있게 됐다는 게 답이야. 그게 답이라고? 그렇게 당연한 게 어떻게 답이야? 나는 인문대의 글쓰기와 사회대의 글쓰기가 다르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가르치는 영역도 역시 좀 달랐는데 정외과 수업을 들으면서 왜 철학이 추상적이라는지 (더 잘) 알게되었다. 수업에서 배우는 것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경우가 많았다. 철학과에서는 이렇게 사건들과 역사적 흐름을 배우는 일은 그닥 없었다. 내 소양이 너무 모자라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정말 아는 게 없구나. 여태 정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뤘구나.
지금 듣는 사회학 수업에서도 사실 뭘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잘 모르겠고 수업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건 지금 경제수학에 뇌가 절여진 탓인지, 그간 철학에 뇌가 절여진 탓인지 혹은 공부를 너무 오랜만에 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잘 안 되니까 답답하다. 공부 어떻게 하는 거였지? 고등학생 때는 사회탐구 어떻게 했더라?
경제학, 수학, 통계학이 적성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철학 수업은 끝나고 나면 그날 배운 것들을 타인에게 대충 설명할 수 있었는데 경제/수학/통계학은 그럴 수가 없다. 끝나고 나서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만 그날 배운 걸 소화해낼 수 있다. 성실하게 복습하지 않으면 또 금세 다음 수업이 오고 교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미친듯이 팔만 움직이다 수업이 끝난다. 근데 나는 대부분 그렇지. 아. 만약 내가 수학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게 그렇게 마음 아플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냥 경제 그런 거 다 적폐 학문이라고 놀리는 친구들과 함께 히히덕대면서 먹고 살려고 하는 거라고 엄청 씹어대면 그만이었을텐데. 어쩌다가 숫자에 진심이 되어서.
오늘 미뤄두었던 경제수학 중간고사 답안지를 보았다. 내가 쓴 답안지와 비교해보니 끔찍한 점수가 나올만 했다. 아, 그래도 몇 점 더 주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 이 정도면 감사해야하나? 재채점을 부탁했다가 오히려 점수가 까일까봐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중이다. 근데 얼마나 더 열심히 해야지 잘 볼 수 있는거지? 혼자 30점대(35점 만점)를 받은 사람은 수학 천재인걸까? 수학 공부 정말 열심히 했고 걱정하던 것보다 잘 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점수는 그렇지 않았다. 기말고사 때 더 열심히해서 뒤집을 거라고 마음을 먹었더니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선형대수가 나를 괴롭힌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들은 경제 통계학도 너무 어려워서 진짜 울고 싶었다.
이사를 할까 마음을 먹었는데 이 모든 걸 다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을 하니 너무 힘들고... 이사하지 말고 그냥 살까 싶다가도 이 정도 마음이 쓰일 정도면 이사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청소기도 고쳐야하고 시험이 끝났으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 얼굴도 봐야하고 집에 떨어진 생필품도 채워넣어야하고 이제 슬슬 과제들도 해나가야 하는데. 이런 와중에 수학과 통계학 공부에 전보다 더 열심히,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할 수 있을까? 가능의 영역에 있기야 하겠지만 그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 희망을 주는 동시에 아주 괴롭게 한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8학기다. 졸업이 한 학기 남은 셈이다. 나는 졸업 논문을 철학과 경제 두 개를 써야하는데 둘 다 주제도 정하지 못했다. 친구들 중에서는 이미 다 쓴 친구도 있고 이제 논문을 써나가는 친구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주제를 못 정해서 지도교수도 못정했어. 뭐 써야해요. 나 이제 철학 다 까먹었는데. 내가 철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는 것에도 의심이 드는데. 나는 이제 경제도 못하고 철학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근데 논문은 둘째치고 나 뭐 해먹고 살지.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네. 아무래도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배워야할 것 같다. 첩첩산중의 인생이여, 이 고통은 언제 끝나나이까... 아직 너무 젊고 살 날이 너무 많이 남아서 지겹다. 인간의 수명연장은 과연 인간을 위한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