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5일

누아nua 2020. 8. 4. 22:42

느슨한글


**에서 살았을 때 가장 큰 공포 중 하나는 보여진다는 것이었다. 내 꿈은 무의식을 많이 반영해서, 당시에 많이 신경 쓰고 있는 일이나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던 일들을 마음속에서 다시 짚어 내준다. **의 원룸에서 살 때는 현관문 하나만 지나면 밖이라는 것, 그래서 그 문을 넘어오면 아무런 가림막 없이 내가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는 게 무서웠던 것 같다. 당시에 꿨던 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잠겨져 있는 현관문이 열려 무방비 상태의 나를 보는 이미지. 나는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었다. 그 감각이 너무 선연해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서도 꿈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그 집에 있을 때는 창문을 거의 열지 않았다. 잠깐 같이 살았던 친구는 내가 집 밖을 나갈 때면 열려있지도 않았던 창문을 반드시 잠근다는 것이나 집에 있을 때도 닫고 지내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집이라 환기를 해야 하는데 답답하지 않냐고 물었고, 창문을 닫고 자면 친구가 열고 내가 자다가 일어나 다시 닫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창밖이 건물로 막혀있어도 여기가 3층이어도 나는 창문을 열고 사는 게 무섭고 그래서 열고 싶지 않다는 감각이 그 친구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였다. 사람이 살아온 경험에 따라서 두렵다고 느끼는 게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여성 안전 관련 집담회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창문을 열지 않고 산다는 친구들이 많은 걸 보고 놀랐던 경험이 있다. 내 삶이 소비될 수 있다는 것, 보여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무방비하고 무력하다는 사실이 꿈에서 본 누군가가 내 집을 열고 들어오는 이미지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올해는 무력감을 느꼈던 순간들이 많았다. 나는 뭔가를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단순히, 마음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황, 누군가가 나를 누르면 나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내 신체의 자유는 쉽게 뺏길 수 있다는 것에서 느껴졌던 무력감은 며칠 동안이고 나를 우울하게 했다. 군중 속에 갇혀서 나갈 수 없던 경험은 너무나도 이상해서 내 안에 어느 지점이 분명히 부서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진다는 것. 보여진다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내 몸에 대한 자유를 온전히 가진 사람일까.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걸까?

A가 이야기해주었던, 젖가슴을 내놓고 협재 해변을 달리고 싶다는 어찌 보면 은밀한 그의 욕망은, 나 역시도 가지고 있었고 늘 궁금했던 감각이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벗은 몸의 자유는 내 방에서, 누구도 볼 수 없게 어떤 문도 닫고,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그렇게 넓은 백사장에서 A의 말마따나, 가슴에 햇빛을 비추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오늘은 노트북을 두고와서 급하게 예전에 쓴 글을 수정해서 올립니다. 핸드폰 메모장에서 찾은 글인데 2018년 11월 25일에 이런 일기를 썼더라구요. 아마 노래를 만드는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이 글을 자주 쓰라고 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던 걸 적은 것 같습니다. 2년이 좀 못 돼 이 글을 보니 지금은 잘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리고 이 글을 읽을 친구들은 아는 얘기가 있을 수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들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때 저는 보통 설명하지 않는 것을 택하는 사람인데, 저도 오랜만에 읽은 이 글이 낯선데 처음 보는 친구들은 얼마나 낯설까 싶어 좀 더 적어봅니다.

제 기억에 2018년에는 드론으로 자취방 몰카를 찍은 사건이 있었던 것 같구요. 소라넷이 수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일상적인 공간에서 안전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1인 가구에 대한 이슈가 많이 나왔던 것 같고 그 일환으로 여성 안전 이슈를 다루는 집담회를 갔던 기억이 있어요(그냥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어요) 어디를 가도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때라 저도 제가 가장 무서웠던 게 뭔지에 대해 돌아봤던 것 같습니다. 자취방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잠깐 같이 살았던 친구는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그 친구는 외국 사람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그해 여름에는 사람들 사이에 갇혀있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 얼마 동안은 친한 친구들 사이에 있어도 마음이 힘들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는 했어요. 그 해에는 그게 저에게 크게 남아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잘 떠올리지 않는데 시간은 참 신기하고 훌륭한 약입니다. A의 이야기는 A가 예전에 해준 엄청 신비롭고 매혹적인 경험을 이야기해주면서 나온 건데요. 그 분의 경험은 제 것이 아니라 적어서 올리기에는 그렇고 언제 만나면 이야기해줄게요. 그 이후로 저는 서른이 되면 보름달이 뜨는 날 오름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것도 완전히 잊고 있다가 이 일기를 보면서 기억 난 거 있죠. 얼마 안남았으니 빨리 오름을 헌팅하거나 마흔으로 미뤄야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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